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1991년까지 계속된 [[고지전]] == [[파일:PLAin19861014.jpg]] 1986년 10월 14일의 라오산 고지에서 촬영된 인민해방군 병사 뤄부지(罗卜基)의 사진. 손에 들고 있는 [[81식 자동소총]]을 통해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촬영 이후 바로 이 10월 14일의 작전에서 전사함으로써 이 사진은 그의 생전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자세히 보면 중월전쟁 중간에 채택된 리버서블 위장복을 사용하고 있으며 6.25 전쟁 이후 수십년간 쓰이던 90식 철모나 GK80과는 다른 방탄모가 사용되었지만 --너무 쓸데없이 큰-- 피아 식별 및 병과 표기 마크를 헬멧과 팔에 부착했다.] 이곳에서는 1991년까지 계속 크고 작은 고지전이 벌어졌으며 심각할 때는 군단급이 맞붙는 전면전 상황까지 갔지만 양국이 정보공개를 꺼리는 사회주의 국가였고 자국에 유리한 보도만을 공개했으며 외국의 보도진이 접근하기 힘든 지역이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양군 모두 전사자가 수천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쟁 이후에도 1980년대 내내 중국-베트남 국경지역에서는 고지를 중심으로 중국과 베트남 양국의 일진일퇴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6.25 전쟁의 고지전을 연상케 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사상자도 꽤 많았지만 서방에는 이 전투들의 치열함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파일:A0MRDPCQ4T8E0001.jpg]] 1980년대 후반 분쟁지의 한 고지를 점령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중국군 병사들. 중국군은 이 고지전을 실전능력을 향상시키려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는지, 담당지역 관할인 쿤밍군구뿐만 아니라 여러 군구들이 소속병력을 로테이션으로 투입했다. 이것은 6.25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군은 3개 사단을 상시로 해당 지역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전황이 심각해질 때는 마찬가지로 남부의 정예병력을 증원했다. 양국은 [[냉전]] 말기인 1988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1989년에는 캄보디아에 있던 베트남군이 철수하였다. 하지만 1991년까지 계속 소규모 접전이 계속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총성이 멎은 것은 중국과 베트남 양국이 공식 수교를 맺고 현재의 국경을 확정지은 1992년이 되어서였다.[* 실제로 중국은 이와 비슷한 예로 [[인도]]와의 산발적인 교전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 라다크 지역에서 중국군과 인도군이 주먹다짐을 하며 서로 다툰 것처럼 전쟁이 끝났어도 위협하는 형식으로 서로 도발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캄보디아는 다시 왕정으로 복귀했고[* 단 [[시아누크]] 왕이 왕정에 시절 저지른 전횡으로 나라가 막장이 되었던 현실을 고려해 실권은 주지 않고 지위만 갖는 입헌군주제를 선택했다.] 친베트남+왕정세력의 연립정부가 출범하면서 크메르 루주는 배제되었다. 냉전 시절에 미중수교가 이루어진 이상 1980년대 내내 이어진 베트남-중국 국경분쟁에서 서방 언론(특히 미국)은 중국 편을 드는 보도를 했다.[* 특이(?)한 건 북한이 중국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트남이 도발해서 중국이 대응한 것으로 자주 보도되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서방-중국은 소련을 견제한다는 입장에서 중국과 한편을 먹고 있었고 베트남은 친소 국가인 데다 베트남 전쟁의 앙금으로 악마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 지속적인 전쟁은 자제하라고 촉구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에게는 중국도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이기 때문. 베트남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미국과 같은 입장인 현재를 감안하면 정말 30년만에 상전벽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